지리산 남쪽의 봄나물 쑥부쟁이
▲약선식생활연구센터 고은정
들국화라는 그룹의 노래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부른 노래 하나하나가 모두 너무 좋아서 미친 듯이 듣고 흥얼거리면서 다녔던 시간들이 있었다. 세계로 가는 기차,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 까지,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등 노래제목을 이어 붙여 문장을 만드는 말놀이 따위를 하면서 낄낄거리고 다녔었다.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꽃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장미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가진 꽃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떠들었었다. 강원도 산간에서 살던 더 어린 시절에는 들국화 어린잎을 뜯어다 나물을 해서 먹고 살았었는데 서울 생활을 하느라 잊고 있었던 꽃이 들국화였으니 가을 야산에 주변의 나무나 풀들과 어울린 들국화 무더기를 기억해내고 했던 말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게다. 해마다 찾아오는 이른 가을에 지리산 자락을 한 구비 돌면 만나고 또 한 구비 돌면 늘 보이던 연보랏빛들국화 무더기에서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좌충우돌하던 철부지 내 모습이 보인 것이. 또 그래서 잊지 않고 해마다 봄이 되어 들국화 새순이 올라오면 바구니 하나 들고 나가 들국화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면서 꼭 한 접시 분량의 나물거리를 뜯어온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된장에 무치면 부드럽고 맛나다. 고추장에 식초 몇 방울 떨어뜨려 무치면 강렬한 맛이 입안에 남고, 간장에 무치면 나물 고유의 맛이 온전하게 느껴져 오히려 풍부한 온갖 봄의 향기가 입안에 퍼진다. 봄이 되면 꼭 한 번은 먹고 지나가야 할 것 중에 빠지면 몹시 서운할 나물이 들국화 새순이다.
며칠 전 후배들과 모여 음식을 나누면서 봄나물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었다. 그때 한 후배가 자기는 해마다 봄이 오면 쑥부쟁이 생나물을 꼭 한 번은 먹어야 봄을 보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나도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바라 내친김에 구례의 지리산 자락에서 쑥부쟁이 농사를 하시는 분께 연락을 해서 좀 넉넉히 구입을 했다. 후배 몇 사람과 나누고 일부는 교육에 식재료로 썼는데 양념에 대한 선호도는 조금씩 달랐지만 다들 향도 좋고 맛있다고 고마워했다.
어린 시절 막연히 들에 피는 국화라 하여 들국화로 부르는 꽃은 사실 국화과의 다년생초로 쑥부쟁이가 제 이름이다. 외할아버지 살아계실 때를 기억해보면 어린 순은 나물로 먹지만 식물 전체를 말려두었다가 약으로 쓰셨던 식물이기도 하다. 신장의 기능이 별로 좋지 않으신 어머니가 늘 부종으로 힘들어 하시면서 소변불리(小便不利) 증세를 하소연 하셨는데 그때마다 외할아버지께서 차로 끓여 먹으라시며 보내주곤 하셨던 산야초의 하나가 들국화인 쑥부쟁이였다.
쑥부쟁이는 사랑, 기다림 등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의 애타는 전설을 담은 꽃말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가에서 울타리 안으로 들여놓지 않은 꽃이라 그런지 나에게는 괜한 서러움이 묻어나 보이는 꽃이다. 더구나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에 위로가 되었던 노래들의 주인이 들국화여서 나는 잊지 않고 있다가 어린 순을 나물로 챙겨 먹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쑥부쟁이 어린 순을 살짝 데쳐 햇간장 조금 넣고 심심하게 밑간만을 했다. 그리고 막 지은 뜨거운 흰쌀밥에 넉넉히 넣고 고추장으로 밥을 비빈다. 참기름도 좋지만 들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리니 입에 착 감긴다. 봄에 산가에서 즐길 수 있는 맛 중의 으뜸이라 할 수 있겠다. 전순의 같은 의사는 아니지만 현대판 <산가요록>이 저절로 써질 것 같은 날이다. <약선식생활연구센터 고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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