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g의 마법, 지리산의 향신료 제피
▲약선식생활연구센터 고은정
모든 음식은 냄새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에 먹던 음식의 냄새는 머릿속에 각인되어 나이가 들어도 잊히지 않고 남아 어떤 장소, 어떤 순간을 막론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곤 한다. 그리고는 향수병처럼 다가와 그 냄새를 가진 음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리를 절절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일수록 가능한 한 많은 음식의 냄새를 기억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음식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서양의 허브나 향신료에 빠져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곳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써오던 질 좋고 독특한 허브나 향신료가 있었다. 생강이 유입되기 전에 자주 애용되던 생강나무가 그렇고 중부지방의 사람들이 주로 즐기던 산초도 향신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리고 남부지역, 특히 지리산 주변에서 다양한 요리에 감초처럼 쓰여 온 향신료에 제피가 있다.
▲제피장떡
초피와 산초는 같은 운향과의 식물이다. 잎이나 열매의 모양은 물론이고 성분이나 그 효능도 비슷하여 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초피와 산초는 다른 나무이며 쉽게 구분하려면 가지에 나 있는 가시를 보면 되는데 산초는 가시가 어긋나 있지만 초피는 가지런히 가시가 돋아 있다. 하지만 모양은 비슷하게 생겼어도 그 쓰임새는 매우 다르다.
산초는 주로 덜 익은 열매를 따서 장아찌를 담거나 익은 열매의 씨앗으로 기름을 짜서 먹지만 초피는 열매의 겉껍질을 가루로 만든 것으로 주로 향신료로 쓰인다. 특히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부지방의 넓은 지역에서 각종 음식에 자주 이용하였으며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된장에 혼합하여 매운 맛을 가진 이 장을 천초장이라는 이름으로 즐기기도 하였다. 영남지역의 가정들에서는 아직도 김치나 나물에 초피의 가루를 넣어 그 향을 즐기는 음식 문화가 남아 있다.
초피는 5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고 입추 무렵이 되면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데 약재나 식재 모두 겉껍질을 이용하는데 그 껍질을 천초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고려 때의 향약을 모두 모아 세종 때에 편찬해낸 <향약집성방>에도 천초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초피는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마늘이나 생강과는 달리 매운 맛을 내는 유일한 재료였을지도 모른다.
초피는 매운 맛을 가지고 있고 그 성질은 따뜻하며 소화기나 폐를 도와주는 효능이 있어 우리 몸의 속을 따뜻하게 하므로 비위로 찬 음식이 들어가 배가 차고 아픈 증상이나 설사, 구토 등에 민간요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톡 쏘는 듯 상쾌하고 매운 맛은 맺힌 것을 풀어주고 소화를 돕는 역할을 하고 초피의 독특한 향은 음식의 잡냄새를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몸에 쌓인 습기를 가지고 달아나므로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가볍게 해준다. 통증을 없애고 살충하는 효능은 물론이고 생선을 잘못 먹고 식중독에 걸렸을 때 어독을 제거하는 약재로도 쓰였다. 그래서 한여름에 몸을 보하기 위해 가끔 해먹던 장어탕이나 가을보양식인 추어탕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 제피가루였다.
제피가루를 이용한 음식도 좋지만 딱 이 무렵 제피의 어린순으로 만드는 장떡은 그 향과 맛이 일품이다.
제피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 곳곳에서 자생하고 있지만 제피의 질은 그 향에 의해 결정되며 대개는 지리산 일대에서 나오는 것이 최상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추가 없던 시대에 밥상의 매운맛을 책임지던 우리 고유의 향신료인 초피(제피)는 고추와는 달리 매운 맛에 더해 중독성이 강한 향이 있다. 일회용으로 포장되어 팔리는 제피의 양은 0.18g, 그 0.18g의 제피는 추어탕 한 그릇의 맛과 향을 완성시킨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0.18g의 마법에 빠진다.
<약선식생활연구센터 고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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